웹진(아이사랑)

[웹진 아이사랑 제61호] 우리 어린이집을 소개합니다

우리 어린이집을 소개합니다.
우리 어린이집을 소개합니다.
가족

  우리 가족은 미국 몬태나에 있는 보즈만이라는 도시로 2017년 초에 이사를 왔다. 한국에서 생각할 땐 몬태나는 다 시골인 줄 알았다. 인구 5만에 불과한 보즈만이란 도시는 마치 강원도의 어느 시골 마을처럼 작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막상 이사를 와서 보니 시골이 전혀 아니었다. 보즈만은 세계 최초 국립공원인 옐로스톤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였기에 많은 관광객이 찾는 도시였다. 보즈만은 전형적인 대학 타운이다. 몬태나주립대학교가 도시 가운데 자리잡고 있으며 인구 5만 중에서 2만 5천명 정도는 이 대학교의 학생, 교직원 및 가족들에 해당한다. 우리 가족은 몬태나주립대학교에서 일을 하게 된 남편을 따라 캠퍼스에 있는 교직원 주택으로 이사를 했다.

  몬태나의 겨울은 어찌나 긴지 3월이 되어도 한겨울처럼 추웠다. 남편은 새로운 일에 적응하느라 바빴다. 그렇다고 외동인 아들과 작은 집에서 둘이서만 함께 붙어있을 순 없었다. 친구를 사귀기 위해서는 우선 아들의 어린이집을 빨리 알아봐야 했다. 다행히 어린이집은 같은 캠퍼스 안에 있었다. 이 어린이집은 캠퍼스에 위치한 만큼 몬태나주립대학교 학생, 교직원들을 우선적으로 받는 곳이었다. 아이들의 나이는 3세부터 7세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어린이집에는 등원을 희망하는 대기자들이 있었다. 그래서 두 달쯤 기다린 후에야 첫 등원을 할 수 있었다.

  처음 해 보는 미국생활이 불편하고 어색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4살이었던 아들도 미국 사람만 보면 낯을 심하게 가렸다. 집에서는 재잘재잘 말을 잘 하다가도 영어로 말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이런 아들이 미국 어린이집에 선뜻 간다고 할 리 만무했다. 전화를 드려보니 선생님께서 등원하기 전 구경을 하기 위해 가족 모두 오후에 어린이집으로 오라는 안내를 하셨다. 엄마 아빠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가는 길은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어린이집이 점점 가까워지자 아들의 표정은 굳기 시작했다.

가장 좋은 미국 친구는 어린이집 선생님

  아들의 담임 선생님은 머리가 새하얀 할머니 선생님이신 샐리 선생님이셨다. 샐리 선생님은 아들이 영어를 알아 듣지 못하는 것을 다 아시면서도 다정다감하게 아들의 눈을 맞추어 가며 말을 걸어 주시고 어린이집 이곳 저곳을 안내해 주셨다. 어린이집은 주제에 따른 5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큰 중앙 홀은 전체 놀이를 할 수 있는 곳이었고, 이외 4개의 방은 미술활동, 스토리텔링, 점심식사, 교사실로 운영되었다. 가장 넓은 공간은 바깥 놀이터였다. 작은 텃밭, 모래밭이 한쪽 옆에 있었다. 가운데에는 여러 개의 놀이시설이 있었고 가장자리에는 자전거를 타는 트랙이 있었다. 울타리가 쳐 있는 공간이어서 아이들이 안전하게 놀 수 있었다.

어린이집 안 가요! 엄마, 내 손 놓으면 안돼요!

  온화하고 인자한 표정의 샐리 선생님을 보고는 아들도 내심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린이집을 둘러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어린이집 안 갈 거예요. 진짜 안 갈 거예요.”를 반복했다. 샐리 선생님께 이런 사정을 말씀드리니 엄마도 같이 어린이집에 와서 있어도 되고 짧게 오전 몇 시간만 함께해도 좋다고 하셨다. 아들을 설득해서 그 다음 날 어린이집으로 다시 향했다. 가는 길 내내 아들은 절대 내 손을 놓치 않았다. 도착하니 벌써 많은 아이들이 바깥으로 나가 놀고 있었다. 하지만 아들은 내 무릎에만 앉아 있었다.

  첫날에는 1시간, 그 다음 날에는 2시간, 선생님께서는 엄마와 함께라도 어린이집에 있는 시간을 늘려가는 게 좋겠다고 하셨다. 아들도 엄마와 함께하니 별 무리없이 어린이집에 갔다. 며칠이 지나고 어린이집에서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함께 할 수 있었다. 아이들은 각자 음식을 접시에 담아 즐겁게 식사를 했다. 엄마와 함께 어린이집 가는 것이 익숙해지자 아들도 안심을 하는 눈치였다.

불안한 아이라면 헤어지는 ‘연습’도 중요해요

  선생님께서는 엄마와 함께 어린이집 오는 것이 익숙해졌으니 이제 헤어지는 연습을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하셨다. 만날 엄마와 함께 어린이집에 가서 같이 있다가 올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드디어 그날이 왔다. 어린이집 등원 후 잠시 안에 같이 들어갔다가 헤어지기, 그리고 오후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한 첫 날. 그날의 아침은 흡사 전쟁과도 같았다. 아침부터 아들은 짜증을 부리고 배가 아프다고 했다. 어린이집에 도착해서부터는 울면서 결국 안 들어가겠다고 소리를 쳤다. 샐리 선생님께서 이 소리를 듣고는 아들에게 괜찮다고 안심을 시키며 일단 같이 들어오라고 하셨다.

  선생님께서는 헤어지는 과정을 설명해 주시며 연습해 보자고 하셨다. 그 과정이란 헤어지기 전 눈을 맞추며 몇 시에 다시 온다는 약속을 확실히 하고 포옹을 한 후, 문 밖으로 나간 뒤에는 창밖으로 손을 흔들며 천천히 집으로 가는 것이었다. 아들은 선생님이 내게 말을 하는 동안 더욱 더 소리를 치며 울기 시작했다. “싫어. 싫어. 집에 가. 집에 가.” 아들의 목소리가 그렇게 큰 지 처음 알았다. 얼마나 우렁찬 지 바깥에서 놀던 아이들도 구경을 하러 들어오곤 했다.

우는 아이
  결국 아들은 바닥에 뒹굴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샐리 선생님께서는 시종일관 미소를 띠고 계셨으나 태도는 굉장히 의연하셨다. 내게 포옹을 했으니 문 밖으로 나가도 좋다고 하셨다. 절대 서두르지 않으셨다. 창 밖에서 보는 아들의 모습은 눈물 콧물이 뒤범벅된 얼굴로 소리를 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옆에는 샐리 선생님이 계셨다. 아들의 손을 잡고 내게 같이 손을 흔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가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갑자기 눈에서 눈물이 났다. 낯설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일은 어른이나 아이나 할 것 없이 힘든 일임에 틀림이 없었다.

  오후에 하원시간이 되어서 어린이집으로 다시 찾아갔다. 엄마와 헤어진 뒤 아들은 몇 시간이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얼굴 표정은 전혀 어둡지 않았다. 그 다음 날도 울면서 소리치면서 어린이집에 도착을 했고 헤어지는 것은 역시 쉽지 않았다. 연일 반복되는 힘든 헤어짐의 시간, 지칠 법도 했지만 샐리 선생님께서는 항상 온화하고 따뜻한 미소로 아들을 대하며 괜찮다는 말을 자주 해 주셨다.

느낌과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 경험을 길러요

GOOD. I like it.

  시간이 지나면서 어린이집에 갈 때 싫다고 말은 해도 우는 횟수나 양은 점점 줄어갔다. 좋은 징조였다. 똘똘이네 어린이집에서는 미술시간과 스토리텔링 시간을 중요시했다. 그래서 그 주제에 맞는 방을 따로 구성했다고 한다. 미술시간에는 소규모의 아이들만 데리고 마치 화가가 된 것처럼 이젤 위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해 주는 점이 인상 깊었다. 스토리텔링방은 꽤 넓었는데 둥그렇게 친구들과 둘러앉아서 선생님이 책을 읽어주고 아이들에게 느낀 점을 말해 보게 했다. 또는 어떤 주제에 관한 비디오를 보고 의견이나 생각을 발표하게 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 어린 아이들이라 말을 잘 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Good.”, “I like it.” 등 짧은 문장으로라도 자신의 생각을 친구들 앞에서 해 보는 경험을 중요시했다.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

  하원할 때 어린이집에서 뭐 했냐고, 어떤 시간이 재미있었냐고 물으면 똘똘이는 주로 바깥 놀이터에서 논 게 가장 좋았다고 이야기를 했다. 매일 똘똘이의 주머니에는 나무칩이나 돌멩이가 몇 개씩 들어 있곤 했다. “엄마, 이건 그냥 나무칩, 돌멩이랑 달라요. 이건 보물이에요. 제가 찾았어요.” 말하곤 했다. 바깥 놀이터의 바닥은 자전거 타는 트랙만 흙으로 되어 있고 대부분 나무 칩과 자갈돌로 이루어져 있다. 아이들은 놀이기구를 이용해서 놀기도 했지만 나무 칩과 돌을 주우면서 노는 경우도 많았다. 마치 보물을 찾는 양, 자기 마음에 드는 나무 칩과 돌을 찾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탐험가가 따로 없었다. 보물을 찾으면서 기뻐하는 아이들, 서로 뭘 찾았는지 보여주면서 자세히 살펴보는 아이들의 모습이 참 예뻐 보였다.

  몇 주가 지나고 나니 아들은 더 이상 아침에 울지 않았다. 가끔 짜증을 부리긴 했지만 그것도 며칠이 더 지나고 나니 사라졌다. 그리곤 어린이집에 다녀와서 재미있었다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영어도 못하는 아들에게 마치 기적이 일어난 것 같았다. 이후로는 오늘은 누구랑 놀아서 좋았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샐리 선생님이 친절해서 좋다는 이야기도 했다. 점점 아들은 어린이집 가는 것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어린이집에서 아들과 함께 하는 동안 어린이집의 하루 일과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인상 깊었던 점은 아이들의 바깥 놀이 시간이 많은 점이었다. 아이들은 등원을 하자마자 바깥 놀이터로 나갔다. 눈이 올 땐 스노우 바지를 겉에 입고 부츠를 신고 나가서 뛰어 놀았다.

젊음과 연륜이 어우러진 어린이집

샐리 선생님 샐리 선생님
선생님들

  당시 어린이집 원장 선생님인 행정 디렉터가 굉장히 젊은 분이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한국에서는 원장, 교장 등의 직을 맡는 분이 대체로 나이가 많았는데 미국은 선생님들의 연령대도 2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했다. 어린이집에서 가장 연장자는 샐리 선생님이셨다. 젊은 선생님들의 패기와 연륜에서 묻어나는 고참 선생님들의 노하우가 어우러진 보육 환경은 더욱 신뢰가 갔다.

  머리가 하얀 할머니 선생님이신 샐리 선생님. 영어를 전혀 모르는 한국에서 온 4살 아들에게 늘 미소 짓고 끊임없이 대화를 건네주신 담임 선생님. 선생님의 따뜻한 지도 덕분에 우리 아들은 마침내 어린이집에 잘 적응할 수 있었다.

  한국에 있을 땐 몰랐다. 그땐 나도 남편도 맞벌이를 하느라 아침 일찍 출근했다가 저녁 늦게 퇴근을 했다. 늘 시간에 쫓기고 마음의 여유가 없었기에 어린이집 선생님들을 가까이에서 뵐 기회가 없었고 얼마나 애쓰고 계신지 잘 알지 못했다. 몬태나에 와서야, 어린이집을 직접 경험하고 선생님을 좀 더 자세히 뵌 후에서야 어린이집 선생님들께서 아이들을 위해 얼마나 수고하고 계시는지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많은 어린이집이 존재한다. 그 안에는 각양각색의 어린이들을 위해 늘 헌신하시는 위대한 선생님들이 계신다. 선생님 덕분에 우리 아들은 한국에서와 같이 몬태나에서도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고 신나게 놀며 즐거운 하루를 보낼 수 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본고는 집필자의 개인의견이며, 한국사회보장정보원의 공식 입장이 아님을 밝힘

글·김미정
미국 몬태나에서 육아를 병행하며 한국의 문화와 한국어를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는 한글학교 교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