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아이사랑)

[웹진 아이사랑 제61호] 육아 즐거워요

육아 최전선에 선 아빠 육아 휴직자의 기쁨과 슬픔
육아 최전선에 선 아빠 육아 휴직자의 기쁨과 슬픔
아이에게 우유주는 아빠 일러스트

육아 휴직하면 뭐하고 놀 거야?

'아빠 육아 휴직'을 사용하는 내게 보이는 무례하면서도 이해하지 못하는 시선들을 느꼈다.
('육아 휴직하면 뭐하고 놀 거야?'는 질문을 수 없이 받았다. 아무리 '육아'를 한다고 해도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들에겐 아빠가 하는 육아는 익숙하지 않았다.) 여전히 육아는 당연히 엄마가 알아서 하는 거라는 인식이 뿌리 깊게 박혀 있었다.
기껏해야 '나는 잘 돕는 편이야'라며 우쭐되는 사람이 있는 정도였다. 육아는 '돕는 게 아니고 함께 하는 것'이라는 기본 명제도 머릿속에 들어있지 않았다.

이는 지금까지도 현재 진행형이다. 아빠로서 육아하는 나를 보는 주변의 시선은 마냥 따뜻하고 곱지만은 않다. 언제까지 그렇게 시간을 낭비하며 탱자탱자 놀 것인지 제 일처럼 걱정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아무리 아이와 함께 하는 가치를 매길 수도 없는 이 놀라운 시간을 설명하려 해도 소용없다. 그들의 꽉 막힌 사고와 철저한 무관심에는 비집고 들어갈 틈이 전혀 없다. 그들에게 아이는 그냥 내버려 두면 알아서 크는 존재 그 이상이 아니다. 아빠로서 육아하는 생활의 어려움은 아이와 지내는 시간에서 나오기보다는 그러한 주변의 몰이해에서 나온다. 그럴 때마다 힘이 쭉쭉 빠진다.

휴직이 어때서?
육아가 최전선이 되면 안 되나요?

아이를 돌보는 아빠 일러스트

지금 내 삶은 아이의 육아가 중심이다. 아빠로서 눈치 보며 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시기를 뒤로하고 이제는 가장 최전선에서 아이와 함께 하고 있다. 아빠 육아휴직을 사용하면서 다시 오지 않을 아이와의 이 시간을 누렸다. 처음 경험해보는 그 굉장히 소중한 시간의 매력에 빠졌다. 이 매력에 헤어 나오지 못하고 육아휴직 기간이 끝난 뒤 개인 휴직을 사용하여 또 다른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렇게 아이와 꼭 붙어 있게 되면서 많은 것이 달라졌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면서 무신경했던 내가 변했다. 이 작고 어린 존재는 주변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함께 지내는 아빠 엄마는 물론이고 어린이집, 유치원, 학교에서 접하는 모든 것들을 스펀지처럼 흡수한다. 백지장처럼 하얀 아이가 물들어가는 모습은 신기하기도 하지만 때론 두렵기도 하다.

옆에서 지켜보는 아이의 물들어감은 경이로움을 선사한다. 세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지식을 알아가고 표현하는 모습은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신비로운 광경이다. 하지만 모든 일엔 명과 암이 있듯이 반대의 경우가 늘 있다. 아이가 몰랐으면 하는 나쁜 말이나 행동도 아주 쉽게 물들어 간다. 가까운 부모로부터 배우는 것을 발견하면 깜짝 놀라며 경각심을 갖는다. 다른 환경에서 물들어오는 것들에 대해서는 속이 타들어 가기도 한다. 이렇게 아이의 크고 작은 변화를 보면서 늘 예의 주시하게 된다.

아이의 성장하는 모습은 때론 외줄 타기처럼 위태로워 보이기도 하다. 특히 집을 나서서 어린이집, 유치원, 학교를 오고 가는 아이를 보면 더욱 그렇다. 부모 곁을 떠나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다양한 환경과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자라난다. 이 과정에서 무사히 하루하루를 커가는 모습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안과 밖에서 벌어지는 가슴을 쓸어내리는 크고 작은 사건 사고들이 그렇다. 아이로부터 전해 듣는 친구들끼리의 위험한 장난, 속상한 괴롭힘과 따돌림의 흔적들. 지나고 나면 모두 거짓말처럼 씻겨가고 성장의 발판이라고 여겨지지만 그 과정을 따라가는 마음은 늘 살얼음판이다. 어느 것 하나만 잘못되어도 아이라는 존재는 아주 크게 흔들리고 상처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빠로서 육아의 중심에 서면서 달라진 점이 있다. 쉽게 분노하지만 금방 잊어버렸었던 아이들의 슬픈 소식을 접하는 태도다. 이제는 쉽게 잊지 못한다. 방관자였던 시절의 손쉬운 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 정인이부터 라면 형제, 그리고 잊을 만하면 터져 나오는 어린이집과 조리원 학대 사건들까지. 남의 일에 도통 관심이 없는 나도 떨쳐내지 못하는 쓰리고 답답한 일들이 머리와 마음에 계속 쌓여간다. 예전에는 그 순간에 무사한 내 아이를 보며 안심했었다. 하지만 그 잠깐의 무사함이 영원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이건 분명히 남의 일이 아니었다. 내 아이도 언제든 위험에 노출될 수 있었다. 이제야 그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아이가 자라나는 커다란 환경의 한 사람으로 들어와 있어 보니 느껴졌다. 남에게 모두 맡기고 나 몰라라 미루어 놓는 것. 문제가 생기면 남 핑계 대고 다른 이를 몰아붙이는 행동이 우리 아이들에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게 되었다.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는 이 말은 그냥 단순하게 육아에 정말 손이 많이 간다는 정도의 이야기가 아니다. 사회의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우리 아이들이 자라는 데 필요하다는 말이다. 모두가 빠짐없이 아이에게 영향을 준다. 누군가의 무관심, 누군가의 부주의가 아이를 위험에 빠트리고 잘못된 길로 인도할 수 있다. 모두의 정성 어린 눈과 귀, 건강한 손과 발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시작은 부모, 아빠 엄마로부터 시작된다. 안타깝게도 그 시작을 위한 준비가 부족하다는 것을 아빠로서 육아를 하며 알게 되었다. 그동안 잘 모르고 지내왔던, 생각보다 많이 삐뚤어진 우리 사회의 민낯을 접하게 되었다.

우리 아이만 무사하면 아무 문제없는 걸까?

아이들은 가장 약한 존재다. 물리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가끔은 어떻게 이렇게 무방비 상태로 세상에 던져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아무것도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없다.
돌봄이 없으면 단 하루, 아니 몇 분조차 버티지 못한다. 이렇게 너무도 취약한 아이들에게 가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곤 한다. 여기저기서 알려오는 처참한 소식들 속의 작고 연약한 아이들을 떠올리면 마음이 꽉 막힌다. 안타까움에 망연자실하기도 하고 잘못한 대상에 분노를 퍼붓기도 한다. 하지만 살아가는데 급급하기에 이런 마음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오히려 내 아이는 무사함에 감사함을 느끼고 쉽게 잊는다. 쉽게 끓어올랐다가 쉽게 사그라지는 내 부끄러운 모습조차 쉽게 잊고 반복한다.

사회 절반의 무관심으로는 우리 아이들이 건강하고 안전하게 자라지 못한다. 그저 자극적인 뉴스에 그때그때 화내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남을 쉽게 비난하고 욕하는 것보다는 집에 돌아가 아이와 대화하고 어떤 환경에서 자라는지 알아가는 것이 관심의 시작이다. 모르면 영원히 바꿀 수 없다.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자세는 아무것도 달라지게 하지 못한다. 남에게 맡겨놓고 아무런 노력도 들이지 않는 안일한 태도는 건강한 육아 환경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 아이들이 안전하게 자라는 환경은 우리 모두 함께 만들어야 한다. 그 아이를 세상에 내놓은 것은 아빠 엄마 모두의 결정이다.

본고는 집필자의 개인의견이며, 한국사회보장정보원의 공식 입장이 아님을 밝힘

글·홍석준(육아에세이작가 '초록Joon'으로 활동)
아빠를 부를 때와 아빠라고 불릴 때의 차이를 알아가는 것이 좋은 아빠이자 남편. 한국에서 공동육아로 3년 수련,
직장 11년차에 육아휴직 후 호주에서 전업주부로 맹활약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