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듀라마는 ‘education+drama'의 합성어로서 고전이나 관련 서적에 소개된 명문가 집안의 자녀 교육방법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첫 번째 순서로 조선시대 사대부인 이문건이 쓴 손자 육아일기 ‘양아록(養兒錄)’을 다룹니다. 양아록은 이문건이 손자 숙길이 태어나면서부터 16세가 될 때까지의 육아경험을 자세히 기록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육아일기입니다. 이 글은 할아버지 이문건이 손자 숙길이 10세 때 매를 든 상황을 재구성했습니다.
(편집자주)
온 산하가 활짝 핀 꽃들과 신록으로 우거진 만화방창(萬化方暢)한 계절이구나. 밤바람에 실린 5월의 꽃향기가 방안까지 향기롭지만 이내 마음은 애달프구나. 손자를 염려하여 조바심 내는 내 마음마냥 등잔불에 내 긴 그림자가 흔들리는구나.
단옷날인 어제 동네 아이들이 그네 타는 것을 보고 너도 타고 싶다고 하기에 허락을 했다. 어제 늦게까지 놀았으면서 오늘도 하루 종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네를 타더구나. 몸종을 시켜 책을 읽으라고 당부했건만 너는 오지 않고 계속 그네만 탔지. 화가 치밀어 쫒아가 그네를 칼로 잘라버렸다.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아 십 여대를 때리고 나서 차마 더 손을 못 대고 이후에 봐가며 때리겠다고 소리쳤다. 넌 엎드려서 한참을 울다가 잠이 들었다.
울다 지쳐 잠든 너의 눈가에 눈물방울이 어려 있구나. 가끔 찡그리며 뒤척이는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이 할아버지의 마음이 아프구나. 아직 열 살. 한창 친구들과 뛰어놀 나이인데 이 할아버지가 너무 엄격하게 키우는 것은 아닌지, 안쓰러운 마음과 ‘군자인’으로 잘 키워야 한다는 책임감이 교차하면서 마음이 복잡하구나.
잠든 너를 보며 오늘도 육아일기를 쓴다.
종아리를 때리고 나서
아이의 종아리를 때리는 것은 내가 악독해서가 아니요
아이의 나쁜 습관을 금지하기 위해서라.
만약 악습을 금지하지 않으면
고질이 되어 금지하기 어려우리.
악습의 기미는 초기에
바로 꾸짖고 금해야 하는 법.
내가 화내는 까닭은
화 잘 내는 아이를 회초리로 징계하여 절제시키려는 것.
아이가 가엾다고 오냐오냐 하면
모든 일을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할 것이다.
(중략)
언제 아이의 지혜가 밝아져
스스로 자신의 허물을 알게 할까.
할아버지의 뜻을 헤아려야 할 것이니
잘되기를 바라는 것은 참으로 지극한 정이다.
응당 후일에 알게 될 터.
느끼게 되는 날 있을 것이다.
육아의 어려움과 보람을 꼼꼼히 기록하다
네가 태어났을 때부터 쓰기 시작한 지난 일기들을 들춰본다.
네가 태어나던 날의 설렘과 성장하면 운이 좋고 상서롭도록 ‘숙길’이라 이름 짓던 일, 귀한 가풍을 잇는 인물이 되길 비는 마음으로 선왕들의 태를 묻은 곳에 네 태를 묻던 날들의 기록을 보며 너의 탄생이 나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한다. 목을 가누고 혼자 앉은 날, 이가 두개 돋던 날, 혼자 일어서서 걷던 날, 그날의 감동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하구나. 벌레에 물려 빨갛게 피부가 부어올랐을 때의 안타까움을 적은 ‘이와 벼룩을 증오하다’라는 글은 내가 봐도 웃음이 나는구나. 말을 배우기 시작하고, 책읽기를 흉내 내는 모습을 보며 느낀 대견함과 뿌듯함이 일기 곳곳에 상세히 기록되어 그날의 감동을 느낄 수 있구나.
윗니가 나다
아랫니 나는 것이 멈추더니
열흘 지나 윗니가 났다.
이제부터 음식을 씹어 먹을 수 있을 듯하니
네가 길이 복을 받을 수 있기를 토지의 신에게 기원한다.
더불어 애달픈 심정을 적은 글도 많다. 유난히 병약한 너는 온갖 전염병을 앓았고 다치기도 많이 해 할아버지를 놀라게 했다. 천연두가 유행일 때는 조상께 제사도 지내지 않고 병으로부터 너를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병에 걸렸을 때는 하늘이 무너질 듯 놀라 애를 태우며 밤낮없이 돌봤다. 그런 할아버지의 정성에도 불구하고 너는 수시로 아프곤 했지. 하도 자주 병을 앓아 이름도 수봉(守奉)으로 바꿨단다. 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너를 돌보며 병을 앓을 때마다 손수 약을 처방하고 음식도 가려 먹이며 각각의 처방들을 일기에 적어 후세에 참고가 되게 하고 있다.
네가 다섯 살 무렵이었을 때가 생각나는구나. 너는 그 무렵 젖을 떼고 이 할아버지와 함께 방을 쓰기 시작했지. 밤이면 그 작은 손으로 내 가슴을 만져야 잠이 들곤 했다. 잠에서 깨면 항상 나부터 찾곤 했지. 병에 걸렸을 때는 할아버지더러 밥 먹여 달라, 똥 치워달라고 해 기꺼운 마음으로 널 간호했다. 내가 외출했다 늦게 돌아오는 날엔 잠도 자지 않고 대문 밖에 나와 기다리다 팔짝팔짝 뛰며 이 할아버지의 품에 안겨 늦게 돌아왔다고 원망하기도 했지. 이것이 한 뿌리 한 가지에서 나온 까닭이겠지. 이런 아름다운 성품이 어른 되어서도 지킬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랐다.
글공부할 나이가 되면서부터 너와 갈등이 심해졌다. 넌 늘 놀고 싶어 하고 이 할아버지는 네가 ‘군자인’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엄하게 글공부를 시켜야 했다. 그다지 영민하지 못한 너를 가르치며 조급해 지는 마음을 애써 다스리곤 한다. 이런 나의 마음을 경계하며 글을 지었다.
자세히 천천히 깨우쳐줘야 한다
자세히, 천천히 깨우쳐주는 것이 당연하다.
성급하게 다그친다고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때때로 나의 잘못을 뉘우치지만 가끔 같은 실수를 되풀이 한다.
이것을 글로 써서 후일을 경계하려 한다.
나의 조급함을 경계하기 위해 이 글을 남긴다.
너를 키우면서 이 할아버지는 생명에 대해 외경의 마음을 갖게 되었다. 참된 인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올바르게 가르치려고 노력했다. 때로 엄격했던 것은 너를 진정한 사대부형 인간으로 키우기 위해서였다. 꾸준히 공부하여 지적 교양과 예의범절을 겸비한 ‘군자인’이 되어 문장을 통해 입신양명하여 가통을 계승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이 기록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나를 대신했으면 한다. 내가 죽은 후에도 네가 할아버지의 글을 보고 그 마음을 헤아려 어긋나지 않기를 바란다. 이 기록들이 너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하며 오늘의 일기를 마친다.
<양아록>은 조선 중기 사대부인 이문건이 손자 숙길을 기르면서 쓴 육아일기입니다. 시문형식의 이 일기에는 손자가 태어나면서부터 16세가 될 때까지의 육아경험들이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손자 숙길은 이름을 떨친 문장가가 되지는 못했지만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동하여 나라에 큰 공을 세웁니다.
이문건(1494~1567)은 선비들간의 반목과 세력다툼이 극에 달했던 조선 중기의 인물로, 조광조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습니다. 사마시에 합격하고 별시에 급제하여 승정원, 사간원 등 여러 관직을 거쳤습니다. 당대의 뛰어난 학자인 이황, 조식, 이이 등 학자들과 편지를 주고받을 정도의 문장가이자 명필로도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의 집안은 ‘다정가’를 쓴 고려말 명재상 이조년이 8대조이고,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직이 5대조이며 부친도 과거에 급제하는 등 명실상부한 명문가입니다.
명문가의 전통을 이어가던 이문건 집안은 기묘사화와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형과 조카가 사망하고 그도 경북 성주로 유배되는 등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몰락의 위기에 처합니다. 가정적인 불운도 겹쳤는데 자식들이 대부분 병으로 불구가 되거나 일찍 사망했습니다. 유일하게 둘째 아들 온만이 장성했습니다. 하나뿐인 아들에 대한 이문건의 기대가 컸지만 온 역시 어릴 때 앓은 열병의 후유증으로 몸과 정신이 온전치 못했습니다. 사화를 겪으면서 가문의 몰락과 대가 끊길 위기에서 유배생활 중에 얻은 손자 숙길(1551~1594)에 대한 이문건의 애정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조선시대 최초의, 그것도 사대부의 유일무이한 육아일기가 탄생한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