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아이사랑)

[웹진 아이사랑 제58호] 부부탐구중

 

영업직인 남편은 직장 외에도 바다낚시 동아리, 동네 아빠들 축구 모임, 선후배 행사 등에 빠지는 법이 없었어요. 그렇다고 가족에게 소홀하지도 않아요. 좋은 여행지나 맛있는 음식점에 갈 때면 처가 식구들까지 챙겨 주는 사람이니까요. 문제는 코로나 19로 바깥 활동이 금지되면서부터예요. 처음 몇 주간은 별문제가 없었어요. 그런데 장기간이 되자 이 남자가 왜 이렇게 불안해하는지 모르겠어요. 본인 말로는 무계획을 견딜 수 없대요.

“여보, 나 살맛이 안나.”

부부관계가 막 끝난 어느 날, 남편이 침대 맡에서 내뱉은 말이에요.

“여보, 사는 게 재미가 없다. 지루해!”

무심코 던진 이 말을 듣고부터 밤잠을 이루지 못했어요. 수치스러웠어요. 초라하기 짝이 없었어요.
그 일이 있고부터는 남편과의 대화가 곱지 않게 되었어요.

 
“오늘 저녁은 배달시켜 먹자. 내가 먹어본 사람들 리뷰를 봤는데
이 메뉴가 인기가 많아. 이 음식은 이 소스를 찍어 먹으면 되는데 말이야…….”
“먹다 남은 거 데워 먹어, 왜 자꾸 쓰레기를 만들려고 해.”
우리 11월에 여기로 가족 여행 가자.
이런 코스로 가면 가성비도 좋은데 내 생각에는 말이야…….”
“혼자 가, 난 안 지루해!”
“재난지원금으로 이거랑 이거 사야겠어, 이거 봐 괜찮지? 잘 골랐지?”
“아니, 별로야.”
 

코로나19 대체 언제 끝나는 거죠? 저 인간 빨리 나가버렸으면 좋겠어요.
예전처럼 밖으로 싸돌아다니면서 내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어요.

아내께서 상처받았네요.

남편이 침대 맡에서 지루하다고 하니까요. 부부관계가 지루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겠어요. ‘사는 게 재미없다. 지루해!’라는 말은 들리지 않을 수도 있어요. 아내는 수치스럽고 초라하게 여겨질 수 있을 것 같아요.

남자들이 대체로 그래요. 간혹 정떨어지는 행동을 해요. 코로나19 때문에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니 살맛이 안 날 수 있죠. 그러나 부부관계 후 침대 맡은 그런 말을 할 적절한 시점도 아니고 적절한 장소도 아니지요. 유명한 남성학자인 Levant(1997)는 이렇게 말했어요. 여자라면 9살짜리도 알고 있는 것을 성인 남자들은 모른다고. ‘이런 말을 이 상황에 하면 상대방의 기분이 어떨까?’를 헤아리는 능력이 없다는 뜻이죠.

그렇다고 남자들이 나쁜 인간이라는 뜻은 아니어요. 대체로 남자들이 생계를 책임지잖아요? 위험한 곳에서 일하는 사람도 많죠. 위기상황에서는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아마도 남자가 먼저 위험을 무릅쓸걸요? 남자들은 무섭고 힘든 일을 인내심 있게 견디어 내요. 힘든 내색도 하지 않고, 기계 같다 싶을 정도로요. 혼란스러울 때 흥분하지 않고 이성적으로 대처하려고 해요. 그리고 무엇보다 여자를 좋아하죠. 여자는 공감 능력이 많고 따뜻하니까요.

남자를 전사로 기르는 사회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고 흔히들 얘기해요. 남자는 금성에서 오고 여자는 화성에서 왔기 때문이라는 사람도 있죠. 젠더 학자들은 시대적 요구에 따라 사회화되어 그렇게 되었다고 해요. 남자로 또는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졌다는 거예요. 전쟁이 나면 나가서 싸울 사람이 필요하니까 남자들을 전사로 길렀다는 거예요. 전사가 마음이 따뜻하고 공감 능력이 많으면 적을 죽일 수 없겠죠? 여자는 집에서 아이를 길러야 해서 공감 능력과 관계 맺는 능력이 필요하고요. 지금은 예전만큼 전쟁이 흔하지는 않죠. 그래도 언제 있을지 모를 전쟁에 대비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아들은 강하게 기르려고 하잖아요? 딸이 울면 달래지만 아들이 울면 혼내지요. ‘남자는 우는 게 아니다’라는 훈계가 뒤따르기도 해요.

이렇게 자라 성인이 되면 어떻게 되겠어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서 자신의 취약한 감정을 억압하고 외면하는 거죠. 그렇게 살다 보면, 자신의 마음을 인식하는 능력과 표현하는 능력이 없어지겠죠? 내 마음도 인식하지 못하니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요. 이런 상태를 정서불감증이라고 해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남자들 대부분이 정서불감증을 갖고 있다는 거죠.

고립된 섬이 되는 남편

아내가 거부하면 남편은 친밀한 관계를 맺을 대상이 없어요. 남자들끼리 친한 것도 아니고요. 그렇다고 다른 여자와 친하게 지낼 수도 없고요. 부모와도 살갑게 지내지 못하고. 친밀감은 오로지 아내에게만 의존하기 때문에 아내의 요구를 들어주려고 기를 쓰죠. 그러나 요구를 들어주는 것과 공감해 주는 것은 차원이 다른지라 남편의 노력은 성공하지 못해요. 아내의 요구 뒤에 숨어 있는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니 눈치 없다는 말을 듣는 거예요. 그리고 자녀들도 아내와 더 밀착되어 있어 남편은 집 안에서도 고립된 섬이 되는 경우가 많아요.

삶의 모든 조건에는 양면성이 있어요.

코로나19로 인해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니 답답하긴 해도 공기는 깨끗해 졌지요? 남편이 아내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면 좋은 점도 있겠죠?
다른 여자에게도 아내에게처럼 눈치 없이 행동할 수도 있고요. 아니면 아내의 정서적 보살핌에 더 고마워할 수도 있고요.
그리고 코로나19 이전의 생활은 어땠을까요? 아내는 집에서, 남편은 출근하면서, 일상이 충분히 행복했나요? 하루하루가 충분히 감사했나요?
분주하게 살아가던 어느 날, ‘이건 아니야. 배우자와 충분한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어.’ 하고 꿈꾸지 않았나요?
그래서 외부 조건과 환경이 주는 불편함에 휘둘리기보다는, 이 조건을 활용하면 좋을 것 같긴 해요. 진부한 표현을 빌리자면 이렇지요. ‘위기가 바로 기회라고.’ 지금 이때 아니면 절대로 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을 거예요.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고 또 모든 것은 변하니까요.

안전하고 견고하다는 뜻은
완벽한 모습을 의미하나요?

내가 욕망하는 완벽한 부부의 세계는 배우자의 희생을 담보로 하죠. 나의 욕망은 나의 결핍에서 나오는지라 배우자의 욕망을
고려하지 못하게 되니까요. 따라서 이상적인 부부는 배우자의 불완전함과 태도의 모호함을 수용하고 인내하는 자세에서 나오는 것 같아요.
가시덤불 속에 핀 작은 꽃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기 위해서는 가시덤불의 모호함과 더러움이 제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말이지요.
아이들을 위한 천국은 부부의 세계와 별개가 아닐 겁니다. 사랑하는 아이들이 천국에서 살 수 있으려면,
부부의 세계가 먼저 천국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글·박광석(서울상담교육연구소 소장)

대학교 및 한국산업카운슬러아카데미 등에서 상담 교수로 활동하며 다수의 개인, 소그룹 및 집합교육을 통해 내담자의 마음 치유에 길잡이가 되어주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역서」 ‘불행한 십대를 도우려면’(원저:Unhappy Teenagers by Dr. William Glasser)이 있습니다.